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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근데 조심하세요, 저 남자, 손에 라이터를 들고 있어요.”

 

내가 학동역에 있는 북스피어 출판사 사무실로 출퇴근하던 시절의 일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학동역에서 내리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어떤 아가씨가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그러더니 “저기요” 하고 입을 떼며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에 내리세요?”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 제대로 들었는데 이해를 못한 거겠지. 내가 “네?” 하고,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되묻자 상대는 아까보다 입을 좀 더 내 귀에 바짝 대고 다시 물었다. “이번 역에서 내리시는 거 맞죠?”라고. 그제야 나는 “아, 네” 하고 대답했다. 딱 부러지는 “아, 네”가 아니라 허둥지둥 백숙을 먹다가 목에 닭뼈가 걸린 듯한 뉘앙스의 “아, 네”였다. 그렇게까지 당황하지 않아도 좋았으련만. 쯧쯧, 당황하고 말았다.

“저, 이번에 내려요” 하며 수줍게 웃던 CF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혹시 이 사람이 지금 나를 유혹하려는 건가.’ 그제야 비로소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랑 세 살 터울인 사촌누나 또래쯤 됐겠다. 내가 멍하니 쳐다보자 상대는 아군에게 암구호를 전파하는 병사처럼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번에 내리시면요, 저기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분을 따라가 봐 주시면 안 될까요.” 자매님의 시선이 향한 곳에 검정색 치마 정장 차림의 여자가 서 있었다. 이 시간에 지하철을 탔으니 아마도 출근하는 중이었으리라. 이상했던 건 남자 한 명이 뒤에 찰싹 붙다시피 서 있었다는 거다. 그게 왜 이상했냐면 두 사람이 전혀 동행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의 나이는 50대 중반쯤 됐을까. 밤색 잠바에 검은색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었고 키는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았다.

자매님이 들려준 사연은 대충 이랬다. 자신이 보기에 정장 여자와 잠바 남자는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잠바 남자가 정장 여자 뒤에 어색할 정도로 가까이 서 있었다고 한다. 출근길이어서 객차가 꽉 찼으니 그럴 수도 있지 않나 했는데 정장 여자가 한 걸음 옆으로 옮기면 잠바 남자도 슬금슬금 뒤에 붙어 서고 정장 여자가 또 한 걸음 자리를 옮기면 잠바 남자도 다시 그 뒤에 붙어 서더란다. 이상하다, 확실히 이상하다고 자매님은 생각했다. 이것은 추행이 아닌가. 잠바 남자가 정장 여자를 추행하고 있다고 자매님은 확신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긴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자기라도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었으리라. 얼마간 무섭기도 했을 테지. 정장 여자가 문 앞으로 다가가 내릴 차비를 했을 때는 조금쯤 안도했을까.

그런데 남자가 거기까지 따라가자 기함하고 말았다. 자매님은 재빨리 고민했다. ‘저 둘을 따라 내릴까. 내가 내릴 역도 아닌데. 신고하면 순찰대가 오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일단은 이번 역에서 내리는 남자에게 부탁하는 편이 나을 수 있겠다.’ 그때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선 내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혹시 잠바 남자에게 들릴까 싶어 자매님은 최대한 조용히 말을 걸었다. 워낙 빠르고 작은 목소리여서 자초지종을 전부 알아들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금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매님도 정장 여자만큼이나 겁에 질린 듯 보였다.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에게 이 정도로 감정이입해 있다니. 이것이, 내가 첫 번째로 감탄했던 대목이다. 나도 자매님과 같은 칸에 타고 있었지만 전혀 몰랐다.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구나. 나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작게 끄덕여 보였다. 불의를 보면 시종일관 끝까지 참았던 내 성정으로 미루어 이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만큼 자매님의 눈빛이 절박해서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는 잠바 남자의 체구가 왜소하고 그다지 운동을 열심히 한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는 점도 한몫했다. 저 정도라면 어떻게든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투지가 용솟음치려는 찰나, 자매님이 주의를 주었다. “근데 조심하세요, 저 남자, 손에 라이터를 들고 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주먹을 쥐고 있는 잠바 남자의 손에 편의점에서 500원만 주면 살 수 있는 일회용 라이터의 윗부분이 보였다. 거기서부터는 나도 슬슬 겁이 났다. 화도 났지만 동시에 겁도 났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칼이나 가위도 아닌데 그게 뭘 겁까지 났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라이터가 화염방사기처럼 보였다. 대구 중앙로역에서 일어나 여러 명의 사상자를 냈던 지하철 방화사건이 떠올랐다.

나는, 나를 도와줄 남자가 있는지 객차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객차에 있는 여자들 대부분이 정장 여자와 잠바 남자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자들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신문을 읽거나 멍하니 허공을 보거나 졸고 있었다. 내가 느끼기에 이 상황을 간파한 남자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들은 달랐다. 알게 모르게 서로서로 눈빛도 주고받지 않았을까. 이것이 내가 감탄한 두 번째 대목이다. 이내 문이 열렸다. 정장 여자가 후다닥 뛰어 내렸다.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나갔다. 그 틈을 헤집고 잠바 남자도 기민하게 정장 여자를 쫓는 모습이 보였다.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나도 따라 내렸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다짜고짜 잠바 남자를 돌려세웠다. 남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야, 이거”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나는 약간 사이를 두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도나 기에 관심 있으세요?”

“뭐요?”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라이터를 쥐고 있는 손을 쓰지 못하도록 팔을 힘주어 붙들며 나는 말했다. “인상이 참 좋으신데. 바쁘지 않으시면 잠깐 얘기 좀 하시지요.” 내가 그를 붙잡고 옥신각신 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정장 여자는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정신없이 개찰구를 통과해서 역을 나가자마자 택시 같은 걸 잡아탔을 거라고 짐작한다.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네, 라는 눈으로 아래 위를 훑어보던 남자가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더니 두리번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역 밖에서도 정장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걸 확인하는 내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나는 잠바 남자가 따라오나 싶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며 회사로 향했다.

“n번방 사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 아이들은 정말 제대로 된 ‘지옥’에서 살게 될 것이다. 지금이 정말 국가위기상황이다. 나, 내 가족만 피해자나 가해자가 아니면 된다고 외면한 이들은 누구였나”며 사회적 무관심을 지적한 서지현 검사의 견해에 완전히 동감한다. 이런 무관심에 힘입어 일베, 소라넷 등에서 유사 범죄가 일어나도 뭐가 어떻게 진행된 건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유야무야 넘어가고 말았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이런 영상을 만든 인간들이, 공범들이, 소비한 회원들이, 가담한 구매자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기를 바란다.

#박사방_박사_포토라인_공개소환

#N번방_갓갓_포토라인_공개소환

#N번방_디지털성범죄수익_국고환수

#N번방가입자_전원처벌

#N번방_수익을_피해여성들_재활비용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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ㅊㅊ ㄷ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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