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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이슈/유머 -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dmitory.com)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라고 할 수 없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때이면 비누 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 앞으로 돌아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

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티셔츠로 갈아입는 그는 성큼성큼 내 방으로 걸어 들어와 아무렇게나 안락의자에 주저앉든가,

창가에 팔꿈치를 짚고 서면서 나에게 빙긋 웃어보인다.

 

"무얼 해?"

 

 

 

 

 

 

 

 


그는 왜 늘 내 방에 와서 먹을 것을 달라고 할까?
언제나 냉장고 앞을 그냥 지나버리고는 나에게 와서 달라고 조른다.

쟁반을 들고 돌아와 보면 그는 창밖의 덩굴장미께로 시선을 던지고 옆얼굴을 보이며 앉아 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내가 곁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조용히 가라앉은 눈초리를 하고 있다.

까무레한 피부와 꽤 센 윤곽을 가진 그의 얼굴을 이런 각도에서 볼 때 나는 참 좋아진다.
나에게는 보이려 하지 않는, 혼자만의 표정도 무언지 가슴에 와 부딪는다.

 

t4.jpg

 

 

 

아주 조금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몇 올 앞이마에 드리워 있다.

"곱슬머리는 사납다던데."
언젠가 그렇게 말하였더니,

"아니 그렇지 않어. 숙희, 정말 그렇지 않어."

하고 그는 진심으로 변명을 하려 드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농담을 하였을 뿐이었는데……











'그'를 무어라고 부르면 마땅할까.
오빠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운명이다.
재작년 늦겨울 새하얀 눈과 얼음에 뒤덮여서 서울의 집들이 마치 얼음사탕들처럼 반짝이던 날,
무슈 리에게 손목을 끌리다시피 하며 이곳에 도착한 나에게 엄마는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숙희의 오빠예요. 인사를 해. 이름은 현규라고 하고."




 

 

 

 

 


'오빠'
그는 나에게는 그런 명칭을 가진 사람이었다.
'오빠'
그것은 나에게 있어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 같은 어휘이다.
그 무리와 부조리에 얽힌 존재가 나다.

 








서울 와서 일 년 남짓 지나는 새에 나는 여러모로 조금씩 달라진 것 같다.
멋을 내는 방법도 배웠고 키가 커지고 살결도 희어졌다.
지난 사월에는 미스 E여고에 당선되어서 하루 동안 학교의 퀸 노릇을 하였다.

그 ―현규―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농담조차 하지 않았다.
축하한다고 한 번 그것도 아주 거북살스러운 투로 말하고는 무언지 수줍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것을 보니까 나는 썩 기분이 좋았다. 









 "숙희야 나 이런 것 주웠는데……"
일요일 아침 아래층으로 내려가니까 소파에 앉아 있던 엄마가 손에 쥐었던 봉투 같은 것을 들어 보였다.

지수는 O장관의 아들이다. 언덕 아래 만리장성 같은 우스꽝한 담을 둘러친 저택에 살고 있다.
현규랑 함께 정구를 치는 동무이고 어느 의과대학의 학생인데 큼직큼직하고 단순하게 생겨 있었다.

그가 걸맞지 않게 적이 섬세한 표현으로 러브 레터를 써 보냈다고 해서 나는 우습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엄마의 엄숙한 표정은 역시 약간 난센스가 아닐 수 없었다.

"글쎄 이게 어디서 났을까."
"등나무 밑 걸상에서."
"오옳아 참 게다 놨었군."










나는 일어나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때 와삭거리고 풀 헤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나며
늘씬하게 생긴 세터가 한 마리 나타났다. 그 줄을 쥐고 지수가 걸어왔다.

우리는 잠자코 한동안 함께 걸었다. 아카시아의 숲 샛길에서 그는 앞을 향한 채 불쑥
"편지 보아주셨죠?"
하고 겸연쩍은 듯한 소리를 내었다.

"네."

"화답은 안 주세요?"

나는
"네.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했다.

그는 성급하게 고개를 끄떡거렸다. 귀가 좀 빨개진 것 같았다.

"그러나 여하간 제 의사를 알아주시긴 했겠죠."
나는 그렇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야기를 끝맺기 위해서 현규가 가까이 또 정구를 치자고 하더라는 말을 했다.

"네, 가죠."
그도 단번에 기운을 회복하며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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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석을 접은 좁다란 층계를 뛰어오르자 나는 곧장 내 방으로 올라갔다.
뜻밖에도 거기에는 현규가 이쪽을 보며 서 있었다.
내가 없을 때에 그렇게 들어오는 일이 없는 그라 해서 놀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몹시 화를 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딜 갔다 왔어."

낮은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한다.

"……"

"편지를 거기 둔 것은 나 읽으라는 친절인가?"

그는 한발 한발 다가와서, 내 얼굴이 그 가슴에 닿일 만큼 가까이 섰다.

"……"
"어디 갔다 왔어."

 

 

 

 

젊은 느티나무 -1960년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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