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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한남 오브 한남이 재능충이라 유명해진 사례 (소설가 김유정)

김유정은 늘 어머니의 사진을 품에 지니고 다닐 정도로 유년기의 상처로 인한 애정결핍이 심했고 연상의 여성에 대한 맹목적인 환상과 집착증세가 있어 유독 여성에게 집착했다. 특히 연희전문에 재학하던 시절, 소리계에서 유명한 박녹주 명창에 대한 스토킹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황당하게도 이게 김유정의 생애를 다룬 글에서 간혹 '짝사랑'으로 미화되는 경우도 있으나, 사실상 그 내막은 스토킹 범죄다. 이는 그의 크나큰 흑역사이며 이런 과거 때문에 그를 혐오하는 사람도 많다.


어느날 우연히 김유정은 목욕을 마치고 목욕탕 문 앞에 서 있던 박녹주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이후 1928년 봄, 조선극장에서 열린 8도 모창대회에 박녹주 명창이 출연한다는 소식을 접한 김유정은 대회가 끝난 후 수소문하여 그녀의 대기실에 찾아갔다고 한다. 박녹주와 대화를 나눈 이후 김유정은 본격적으로 박녹주를 연모하게 되어 편지를 보내 정식으로 그녀에게 고백을 했고, 이미 1920년에 원산의 부호 남백우와 살림을 차렸던 박녹주는 그의 편지를 찢어버렸으나 "그래도 한 번 정도 만나보는게 어떠냐"는 친구의 말을 듣고 김유정을 집으로 불렀다. 녹주는 김유정에게 "나는 이미 남편이 있는 몸이니 쓸데없는 생각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며 점잖게 타일렀다. 그러나 김유정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며 막무가내였다. 게다가 오히려 이때의 일로 그녀의 동생 태술과 친해진 김유정은 그를 통해 본격적으로 각종 선물이나 레코드판에서 뜯어낸 박녹주의 사진 밑에 ‘당신을 연모합니다. 저의 사랑을 받아주옵소서’ 라고 적힌 편지 등을 박녹주에게 보내기 시작한다. 또한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유정이 이즈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고. 물론 박녹주는 김유정이 이러한 편지들을 보내는 족족 갖다버렸다.


그러자 김유정은 본격적으로 박녹주를 스토킹하기 시작했다. "당신이 무슨 상감이나 된 듯이 그렇게 고고한척 하는 거요. 보료 위에 앉아서 나를 마치 어린애 취급하듯 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하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이오. 당신이 사랑을 버린다면 내 손에 죽을 줄 아시오.라는 편지가 시초였으며, 집착과 망상도 점점 심해져 처음에는 박녹주를 "선생"이라고 하더니 "당신"이라고 변했고 나중에는 "너"라고 자기 부인을 칭하듯이 불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은 박녹주가 외출을 나갔다가 인력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김유정이 하얀 몽둥이를 들고 그녀를 불러 세웠다. 유정은 "녹주야 내려라 내 오늘은 너를 해치지 않으마"라며 말했고 녹주는 떨면서 인력거에서 내렸는데 그녀에게 유정이 대뜸 "네가 내 구애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내가 돈이 없는 학생이라 그런것이지?"하고 말했다고 한다. 녹주는 의외의 질문에 당황하는 한편, 잘못 말하면 자신이 돈에 집착하는 천한 여자로 여겨질 것 같아서 "저는 나이도 돈도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단지 당신에게 마음이 가지 않는 것도 제 잘못이란 말입니까?”라며 한 소리 했다고 한다. 그러자 김유정은 도망갔으며 다음날 박녹주의 집 앞에서 김유정이 대성통곡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스토킹은 점점 심해졌고 박녹주는 외출도 거의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1928년 겨울의 어느 날에는 김유정이

오늘 너의 운수가 좋았노라.

그 길목에서 너를 기다리기 3시간,

만일 나를 만났으면 너는 죽었으리라.

엊저녁에는 네가 천향원(天香園)으로 간 것을 보고 문 앞에서 기다렸으나 나오지 않았다.

만일 그때 너를 만났다면 나는 너를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지 마라.

단 며칠 목숨이 연장될 따름이니까.


라는 내용의 혈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두 사람의 스캔들은 경성 전국에 퍼지게 되었고 결국 참다못한 박녹주는 1929년 여름, 김유정을 다시 한번 집으로 불러서 "무슨 학생이 공부는 안하고 편지질이오? 학생과 기생이 무슨 연애를 하자는 말이요? 학생이 이러면 나도 가슴이 아프오 공부를 끝내면 다시 나를 찾아 주시오"라고 말했고 김유정은 "학생과 소리하는 사람이 사랑해서 안된다는 규정이 어디에 있냐"고 대들며 "도대체 네가 사람이냐"라고 외쳤다고 한다. 박녹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김유정은 죽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박녹주에게 "너무 큰 소리를 쳐서 미안해"하고 사과를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30분을 있다가 헤어졌고 그날 이후 비로소 김유정의 스토킹이 멈췄으며 이후 김유정은 박녹주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1931년 5월 2일자 매일신보에 박녹주가 아버지의 학대로 인한 스트레스 및 조선극장 지배인이었던 신모씨와의 애정문제로 자살소동을 벌였다는 소식이 대서특필되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1년전에 중퇴한 김유정은 다짜고짜 박녹주가 입원 중인 병원을 찾아가서 “진짜 죽은 줄 알았어요. 만약 당신이 죽으면 저도 같이 따라갈게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병실에 있던 박녹주는 "괜한 기대말고 돌아가라."며 소리쳤고 그것이 박녹주와 김유정의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한다. 직후 박녹주는 순천의 거부인 김종익과 결혼했다. 박녹주는 결혼 이전부터 김종익과 교류를 했었으며 김종익은 이 인연으로 국악계에도 지원을 많이 하였다.


김유정의 스토킹 행적을 알고나면 '이런 자가 청소년에게 알려져도 되나?' 싶을 정도다.


김유정은 삶을 다할 때까지도 박녹주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던 것 같은데 김유정이 서른 살 나이로 요절했을때 그의 방안에는 '녹주, 너를 연모한다'는 혈서가 벽에 붙어있었다. 그래서 김유정의 장례식을 치른 안회남이 술에 만취한 채로 박녹주의 집에 나타나 "당신이 박녹주요? 친구는 당신이 죽인 거요. 죽을 때까지 당신을 잊지 못하고 갔소!"라며 원망했다고 한다. 김유정에게 이골이 날 정도로 시달렸던 박녹주도 그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회고록에서 "김유정에게 너무 박절하게 대한 벌을 뒤늦게 받아 내가 평생 슬하에 자식 없이 살았나 보오. 그가 그토록 훌륭한 소설가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손이라도 한 번 잡게 해 줄 것을."라는 말을 남겼다.




마지막줄 너무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피해자 반응이라 내가 다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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