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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광기의 도주마라고 불렸던 명마 카부라야 오의 진실

일본의 경주마. 동기인 암말 테스코 가비와 함께 무모하다 싶을 만큼 빠른 페이스의 대도주가 특징으로 그것만으로 생애 통산 13전 11승을 거둔 2관마이며, '광기의 도주마(狂気の逃げ馬)'라는 살벌한 별명으로 불렸다. 이름은 신호나 선전포고에 쓰는 소리내며 날아가는 화살인 '적시(鏑矢)'에서 따왔다.


특별할 것 없는 혈통으로 태어났으며, 경주마 치고는 늦은 6월 태생이라 체구도 작아 다른 말들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그 영향으로 소심하고 겁 많은 성격이 되어 사람을 보고도 달아났으며, 그나마 부모를 닮아 건강하다는 것이 유일한 장점이었다. 모마인 카부라야의 마주 카토 토시코(加藤とし子)는 당시 소유하던 카부라야 오를 개인적인 이유로 매각하려 했으나, 300만 엔이라는 가격에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부득이하게 자신이 소유한 채 데뷔시켰다.


1974년 11월 10일의 데뷔전에서는 그다지 큰 기대를 받지 못해 출주한 19필 중 7번 인기였으나 2위로 들어오면서 선전했고, 같은 달 23일에 치른 3세 신마전에서 2착마와 3마신 차이로 우승했다. 그 후 출주한 히이라기상에서도 13필 중 8번이라는 낮은 인기였으나 6마신 차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듬해인 1975년 1월의 주니어 컵부터는 주목을 받기 시작해 1번 인기로 출주했고 10마신 차 대승을 올린다. 그 후 1975년 5월까지 출주한 모든 경주에서 우승하며 연승가도를 달린다.


1975년 4월, 1번 인기로 출주한 사츠키상에서 초반 1000m를 58초 9라는 정신 나간 페이스로 질주하며 2착과 2마신 반 차로 우승했는데, 이 페이스를 따라가던 말 레이크 스프린터(レイクスプリンター)가 오른쪽 뒷다리 골절이라는 부상을 입고 예후불량으로 결국 안락사당했다. 당시 레이크 스프린터의 기수였던 오시다 토시로(押田年郎)는 울면서 "저 말은 보통 말이 아니라 괴물이다"라고 인터뷰했고, 이 경주 이후로 카부라야 오에게는 '살인 랩(殺人ラップ)', '광기의 하이페이스(狂気のハイペース)'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이 붙었다. 고속마장화가 진행된 현재의 일본 경마에서야 초반 1000m를 저 정도의 하이페이스로 달리는 경주마가 자주 있으나, 저 당시에 이런 타임을 내면서 우승까지 한 말은 카부라야 오 정도뿐이다.


다음달인 5월 25일에 열린 일본 더비에서는 초반 1000m를 사츠키상 때보다 빠른 58초 6으로 달렸고, 1200m에서는 1분 11초 8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2착마 롱 패스트를 4분의 1마신차로 따돌리고 우승했다. 이 시점에서 카부라야 오는 8연승을 기록했고 3관 달성이 유력했으나, 9월 말에 편자를 교체하면서 왼쪽 다리의 발굽을 너무 깊게 깎는 바람에 굴건염이 발병해 킷카상은 출주하지 못했고 장기 요양에 들어가야 했다.


요양에 들어간 지 8개월만인 1976년 5월 22일 도쿄 오픈에 출주해 반 마신차 승리를 거두며 건재함을 과시했으나, 다음 경기인 나카야마 오픈에서 게이트에 머리를 부딪히는 바람에 11착이라는 생애 유일한 착외 패배를 당한다. 그 후 출주한 단거리 스테이크스와 도쿄 오픈에서 2연승을 추가해 그 해 천황상(가을)의 유력한 우승후보로 여겨졌지만, 또 굴건염이 발병해 그 길로 은퇴해야 했다.


1977년부터 종마로 전업했다. 작은 체구에 '이계의 혈통', '광기의 혈통'이라 불리며 좀처럼 교배료도 오르지 않았고 결코 대성한 편은 못 되었으나, 1988년 엘리자베스 여왕배를 우승한 미야마 포피(ミヤマポピー)를 배출하기도 했다.

1997년에 종마도 은퇴하고 토치기 현의 일본 경종마회 나스노 목장에서 여생을 보내다, 2003년 8월 9일에 노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죽을 당시의 나이는 31세로, 서러브레드로서는 매우 장수한 말이었다.


위에 소개한 테스코 가비와는 도쿄 4세 스테이크스에서 단 한 번 맞붙었는데, 카부라야 오가 간발의 차이(머리)로 승리했다.


카부라야 오는 '광기의 도주마', '살인 랩', '광기의 하이페이스' 등 살벌한 별명으로 불리며 명마의 반열에 올랐으나, 여기에는 웃지 못할 뒷사정이 있었다.


카부라야 오는 어릴 적 작은 체구 때문에 다른 말들에게 괴롭힘을 많이 당했고, 그런 성장 과정에서 형성된 극도로 소심하고 겁 많은 성격으로 인해 몸싸움이 어려워져 도주 전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경주에서는 다른 말들이 무서워 옆에서 뛰기 싫다며 필사적으로 도망쳤던 것이다. 오죽 겁이 많았으면, 심지어 결승선을 얼마 안 남긴 시점에서 후속마가 접근하면 무서워서 몇 미터를 급격히 사행하는 버릇까지 있었다. 당시 경기를 보면, 다른 경주마가 추격해오자 갑자기 비틀거리며 멀찌감치 떨어지는 모습이 종종 보인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튼튼한 몸과 뛰어난 심폐기능을 타고나, 궁여지책을 '광기의 대도주'로 포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카부라야 오가 현역에서 은퇴하고도 한참 지나 종마 생활을 하던 1980년대 후반에야 밝혀졌는데, 현역 경주마 시절에는 겁 많은 성격이 약점으로 공략당할까봐 조교사와 기수들이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얼마나 철저했는지, 카부라야 오의 마방 소속 전담 기수가 자신이 기승하던 다른 마방의 유력마 테스코 가비와 같은 시합에서 뛰게 되자 일단 같은 마방 소속 신인 기수를 카부라야 오에 태우고 자신은 테스코 가비를 계속 타되 도주를 택하지 않아 카부라야 오의 약점이 드러나지 않게 하는 등, 돌아보면 논란의 여지가 있는 행위도 있었다. 은퇴 후에는 사츠키상과 더비를 제패하고 9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카부라야 오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함구했다.


전형제 여동생인 미스 카부라야는 현역 기간 동안 선입 전략을 택했으며 당시의 암말 3관 마지막 대회인 엘리자베스 여왕배에서는 추입 전략으로 우승했는데, 이로 미루어보아 카부라야 오도 소심하고 겁 많은 성격이 아니었다면 도주 외의 다른 전략도 펼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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