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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한강 작가 피아노 배우고 싶었던 일화.txt

[한강 작가가 썼음!] 

 

 

 

나에게도 꼭 한 번 부모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해본 적이 있었다. 바로 피아노를 배우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노래를 좋아했다. 평소엔 목소리가 작은 편이었는데 노래 할 땐 커졌다. 음악시간을 좋아했고 리코더 불기를 좋아했다. 계 이름을 일 필요 없이, 들은 대로 불어지고 계이름도 자연스레 떠 올랐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갈망은 한 해 한 해 눈덩이 불어 나듯 커져서, 서울로 막 이사온 5학년 때는 더이상 견디기가 어려웠다. 같은 동네에 살아서 함께 하교하던 친구가 피아노학원에 다 녔는데, 그 아이가 그토록 지겨워하며 어떻게든 레슨을 빠지려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침내 피아노학원에 보내달라고 어머니에게 말했을 때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부터 나는 며칠 동안 어머니 뒤를 따라다녔다.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계시면 그 옆에 쪼그려앉아 있고, 빈 빨래 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들어가시면 그림자처럼 뒤따라 가 부엌에 서 있었다. 여름방학이었는데, 아직도 그 마당의 침묵, 어머니가 굳은 얼굴로 빨래를 털어 널던 모습, 자꾸만 내 종아리로 기어오르던 커다란 개미들이 생각난다. 별다른 고집 없이 자라던 둘째가 한 번도 안 하던 시위를 하니 부모님은 조금 당황하셨던 것 같다. 곤혹스러운 며칠이 지난 뒤, 마침내 어머니는 꽥 소리 를 지르셨다.

안된다니까! 우리 형편에.

그날부터 시위를 그만두고 방에 틀어박혔다. 가슴이 까맣게 탄다는 느낌을 그때 처음 알았다. 밥도 맛이 없고 모든 게 시들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피아노를 못 가르쳐주신 걸 보면 그때 부모님의 형편이 어렵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얼마 뒤 나는 문방구에 가서 십원을 주고 종이 건반을 샀다. 책 상에 네 귀퉁이를 압정으로 붙여놓고, 학교에서 간단히 배운 대로 노래를 연주했다. 물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고개를 까닥 거리며 신나게 쳤다. 시위를 하거나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려 는 생각은 전혀 없는, 그저 아이다운 낙천성이었을 뿐인데. 시간이 많이 흐른 뒤 어머니에게서 들었다. 내가 종이 건반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던 때가 그 시절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기 전, 봄방학이 시작됐을 때 부모님이 안방으로 나를 불렀다. 엉거주춤 앉는 나에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피아노를 배우라고.
삼사 년 전이었다면 뛸 듯이 기뻐했겠지만 나는 좀 어리둥질했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어지럽게 피아노에 매혹됐던 시기는 홀연히 지나가버렸고, 혼자서 끄적이던 일기나 시에 몰두해 있던 때 였다. 사실, 연합고사를 앞둔 중학교 3학년 때 피아노를 시작하는 아이는 없었다. 대부분 초등학교를 졸업하며 피아노학원도 졸업 이었고, 계속한다면 그쪽으로 진로를 생각하는 아이들뿐이었다.

괜찮다고 나는 말했다. 별로 배우고 싶지 않다고. 시간도 없을 것 같다고.

그때 어머니가 우셨다. 내가 뙤약볕 속에 쪼그려앉아 어머니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때는 그토록 냉정하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어머니가.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네가 배우기 싫어도, 엄마 아빠를 위해서라도 일 년만 다녀줘라. 안 그러면 한이 돼서.

이번에는 어머니가 눈물을 닦으며 말씀하셨다. 내 책상에 일 년도 넘게 붙어 있었던 종이 건반에 대해서. 그걸 볼 때마다 까맣게 타들어갔던 마음에 대해서.

나는 그만 멋쩍어져서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그 숙연한 방을 어서 빠져나갈 생각만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이어 말씀하셨다.

배워보고 재미있으면, 대학 들어가면 피아노도 사주마.
아휴, 우리집에 피아노 놓을 데가 어디 있다구요.

점입가경이라니...... 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마음이 되어, 실없이 웃으며 그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한강 작가, 디 에센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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