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유머 [펌글]룸바가 죽었다.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9286667


룸바가 죽었다.

노쇠한 개처럼 비틀거리며 움직이던 원반이 덜컹하는 이상음과 함께 멈추더니 버튼을 눌러도, 전원 케이블을 직결해봐도, 배터리를 갈아 끼워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 아이가 태어날 때 같이 집에 찾아온 청소 로봇의 마지막은 너무나 허무해서 아직도 나는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0년 전 기종이었던 만큼 손이 많이 가는 아이였다.

약간의 단차로도 움직이지 못하고, 충전홈을 잃어버려 거실 한가운데 멈춰서 있는 걸 들어 옮긴 적도 수없이 많았다.

배터리도 몇 번이나 교환해줬고 손잡이는 열화되어서 부러졌다.

그럼에도, 벽에 부딪혀가면서 열심히 쓰레기를 빨아들이는 모습은 적지 않은 감명을 주는 부분이 있었다.


'오래 썼으니까, 새거로 사면 되잖아' 라고 하는 초4 딸.

네가 기어다닐 무렵, 룸바가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무서워서 울던 일은 기억나지 않겠지.

아직 숟가락이나 포크도 제대로 쓰지 못할 때 먹다 흘린 수많은 밥알의 잔해를 빨아 들여준 게 누구였을까.


룸바는 전우였다. 가사를 전혀 도와주지 않는 남편을 대신해서

먼지가 굴러다니는 마루를 깨끗하게 해주는 믿음직한 존재.

매일 아침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회사에 가기전, 바닥에 흐트려져있던 옷이나 책을 서둘러 소파위에 올리고 룸바의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일을 누군가에게 맡길 수 있던 때였다.


이제 두 번 다시 움직일 일 없는 룸바를 보면서 멍하니 생각한다.

겨울 보너스를 가지고 새 모델을 사서, 역시 최신 기종은 편리하구나 하며 기뻐하며 스러져간 룸바를 잊게 될까.

 

장래에 AI를 탑재한 로봇이 보급되면 폐기물 스티커를 붙일 때마다 이런 심정이 들게 될 것인가.


댓글은 회원만 열람할 수 있습니다.

로그인 회원가입
게시판 설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