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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네이트판]다 큰 딸의 일기장을 읽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아이가 어렸을 때 저는 바람을 폈고, 남편은 그런 저를 때렸습니다. 고작 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 가정이 무너졌고, 아이는 매일 악몽같은 집에서 혼자 자랐습니다.

남편과 제가 서로를 증오하고 삶을 비관하는 동안 아이는 정말 알아서 쑥쑥 크더군요. 어느 순간 갑자기 전교 1등을 하더니, 혼자 학원과 인강을 알아와 등록만 해달라고 하고 어느 날은 갑자기 특목고에 간다고 하더니 입시 학원 하나 다니지 않고 혼자 준비해서 정말 떡하니 붙어왔습니다. 애가 초등학교 때야 정말 못볼 꼴 보이며 매일같이 집에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만... 중학교서부터 뛰어난 성적표를 아이가 들고 오니 저희 부부도 조금씩 정상적인 모습으로 갖춰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기억은 자꾸 남편을 좀먹는지 주기적으로 남편이 술을 마시고 나면 꼭 저와 아이를 여러모로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말하더라고요. 특목고에 간 이유도 기숙사 때문이었다고...

최상위권이었던 아이는 고등학교에 진학해 중위권으로 떨어졌고, 날로 갈수록 예민해져 집에 오는 주말이면 집은 살얼음판이 됐습니다. 항상 남편과 아이 비위를 맞추던 저도 그 시기엔 아이에게 학생 신분이 대수냐고 짜증을 냈고, 남편과 아이의 사이는 극악으로 다다랐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이가 경기를 하며 쓰러지더군요. 눈앞에서 오줌을 지리며 발작하는 모습을 몇 번 보고 나니 속이 그냥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목이 턱턱 막혔습니다. 내가 그동안 이 애한테 얼마나 많은 걸 바래왔나. 술 취한 아빠한테 뺨을 맞고 머리채를 잡히면서도 눈동자 부릅 뜨고 따박따박 자신이 혼자 일궈낸 성과를 따지고 드는 아이였는데, 발작 후에 혼자서 걷지도 못하고 일상생활 조차도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아, 천벌이 바로 이런거구나 하고 남편과 뼈저리게 뉘우쳤습니다. 그 뒤론 욱하는 성격의 남편도 도자기 다루듯, 원래 아이에게 약했던 저도 더욱 더 무르게 아이를 대했습니다. 차린 밥이 맘에 안들어 방에 들어가면 새 반찬을 해서 다시 차리고, 잔병치레로 약이나 연고가 필요하다 하면 밤 11시에도 남편이 차 타고 나가 기숙사에 갖다주고, 어느 날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빈정이 상해 하루 종일 말을 무시하고 방에 틀어박혀도 아무 말 않고 그저 기다렸습니다. 시간이 흐르니 서서히 집안 분위기도 풀리더군요. 대학에 붙고 나니 예민함도 덜해지고, 애교도 부리고, 세상에서 엄마가 제일 싫고 증오스럽다고 소리치던 아이가 먼저 팔짱을 끼고 쇼핑을 가자고 해줬습니다. 남편 더러 쌍욕을 하며 저런 건 아빠도 아니라던 아이가 어버이날에 아빠에게 명품 지갑을 선물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다시 화목해질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원래 전시회나 공연같은 걸 좋아하는 아이라 평소 다이어리를 아기자기하게 꾸며서 쓰는 걸 종종 봤는데... 출근한 새 무심코 보여 그러면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펼쳐봤습니다. 가슴이 무너지더라고요. 스티커, 그림으로 예쁘게도 꾸며져 있는 다이어리에 아이 마음이 꾹꾹 눌러적혀있었습니다.

엄마가 퍼질러 자는 걸 보고 있으면 베개로 눌러 죽이고 싶다가도 부엌에 끓여놓은 찌개를 보면 못하게 된다. 아빠가 지가 한 짓은 생각도 못하고 아빠 대접을 바라는 걸 보면 침을 뱉고 싶다가도 고기가 먹고 싶단 말에 스테이크를 굽고 파스타를 한 냄비 차리는 걸 보면 그만두게 된다.

이밖에도 초등학교 때 있었던 일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매일 떠오른다며 괴로워하는 내용이나, 고등학교 때 그만둔 줄 알았던 자해 얘기들이 적혀있었습니다. 심장이 쿵 떨어져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일기장을 두고, 퇴근하고 대학원까지 갔다 집에 온 아이한테 평소처럼 밥 먹이고 자려고 누웠는데 잠이 오질 않더라고요...

제가 행복하기에 아이도 행복한 줄 알았습니다. 부모 콩깍지 벗고 봐도 성격이 예민하고 깍쟁이같은 면이 있어서 그렇지, 얼굴도 예쁘고 능력도 좋아 어딜 가나 사람을 이끄는 딸입니다. 보고 자란 게 있어 자기는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겠다는 말에 남편과 저는 남은 인생, 커리어 탄탄대로로 쌓아가는 아이 뒷바라지 하며 모든 걸 물려주고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저희와 함께하며 불행하다면 어찌해야되는 걸까요.

마음같아서는 자취방을 구해다주고 주말이나 명절에만 만난다면 정말 좋겠지만... 말했다시피 지병이 있는 아이라서 꼭 붙어 케어해줘야 하니 막막합니다. 살면서 요리, 청소, 빨래 한 번 제 손으로 해본 적 없고 일에 파묻혀 약 먹는 것도 남편과 제가 알람 맞춰 가져다주어야만 챙겨먹습니다. 등교하는 학생 태워다주는 부모마냥 출근길도 남편이 태워다주고, 남편과 제가 여행 간 어느 주말은 이틀 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잠도 안 자고 시간도 잊은 채 논문을 쓰다 결국 또 발작으로 응급실에서 전화가 오길래 그 뒤론 아이만 두고 장기간 집을 비운 적도 없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아이에게 최선의 선택이 될까요... 세월이 흐르면 결국 저와 남편도 떠날 날이 올텐데, 커리어만 크고 감정과 기억은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 그 때에 갇혀있는 아이가 홀로 어찌 살아갈 지 생각하면 정말 막막하고 죄스럽습니다. 정신과 상담을 받게 하자니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막막하고, 다른 것보다 자기 일을 최우선으로 두는 아이라 하루를 쪼개 상담을 받자고 설득하는 것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냥 모른 채 일기장 내용은 묻어야할까요.


https://pann.nate.com/talk/359594276?type=2&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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